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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福音 묵상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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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1요한1.5-2.2.마태2.13-18)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푼다.’라는 영어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느끼고 체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불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고통, 거짓된 자아를 따르려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은 그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고 합니다. 집착이라는 줄을 놓아버리면 집착에 매달려 있는 고통도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집착을 놓아버리는 훈련이 필요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렇게 집착에서 벗어나지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참된 자아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교회는 고통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에게 ‘고통’이라는 벌을 주셨습니다.

 

최초의 고통은 노동하는 고통과 아이를 낳는 고통입니다. 죄의 결과 죽음이라는 고통이 생겼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회개’입니다. 회개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육체라는 집이 허물어지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하나는 ‘대속(’代贖)입니다. 구약에서는 ‘어린양’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바쳐서 임당수로 뛰어야 했습니다. 이수현이라는 청년은 일본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고 대신 목숨을 바쳤습니다. 대속에는 자발적인 대속이 있고, 힘으로 바쳐지는 대속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은 자발적인 고통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를 향한 끝 모를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을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고통이었지만, 신앙인에게는 영원한 삶으로 나가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록하였고, 그분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는 교회를 세웠고, 성지를 조성하였습니다. 교회가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받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우리는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의 신비를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 홀로 외롭게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 또한 천상의 별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는지, 고통과 시련은 왜 다가오는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이것이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깊은 묵상 중에 ‘신앙의 원리와 기초’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이 보았던 ‘원리와 기초’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억만년을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국립현충원에는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을 위한 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조국을 지키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기리나이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