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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人의 삶

<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

<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

가끔 신자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과연 저 사람이 믿는 하느님과

내가 믿는 하느님이 같은 분이실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끔은 혹시 그거 샤먼?

혹시 불교? 아님 유교? 하고

묻고 싶어지는 때도 많았다.

누군가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맨 껍데기는

그리스도교이지만

그 안쪽에는 유교가 있고

그 안쪽에는 불교,

그리고 그 가장 핵심에는

샤먼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 말도 아마도 같은

이치일 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내가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에 사로잡혀서

마음속으로, “음,

저 사람은 지금 오로지

기복적인 샤먼의 이야기를 하고 있군.

음, 저 사람은 결국

유교의 이야기를 하고 있군”하며

내심 비웃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께서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도,

성당에 들어가 기사처럼

한 무릎을 꿇는 것도

실은 그 나라의 고유한

풍습들과 결합한

결과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좀 달라졌다.

독일에 잠시 사는 동안

그들이 부활의 상징으로

토끼를 선물하는 것도

실은 게르만의 풍습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욱 그랬다.

누가 하느님을 알겠는가,

누가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다, 아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신부님? 수녀님, 혹은 레지오 단장이?…

나는 그런 분들의

단언적인 이야기에

실은 상처를 많이 입은 사람이었다.

가톨릭의 교리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좀 낫다.

그러나 가톨릭의 교리조차도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은 것…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의 정신은

언제나 법칙보다는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서,

아주 작은 일에

‘죄, 죄’ 하는 자매님들이 밉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른다.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말을 한다 해도

사람들이 가지는

사랑의 이미지조차

사람들의 얼굴들만큼 수가 많으니

요즘 아이들 쓰는 말로

“그때그때 달라요”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리스도교가 내게 가르쳐 준

아주 확실한 것도 있다.

그것은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사랑의 개념이 다르다 해도,

혹은 잘못된다 해도

그 사람 마음속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존엄한 가치를 아는 일일 것이다.

상처입고 비뚤어지고

설사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이라 해도

그 사람 마음속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고 나면,

껍데기만을 의식하는 것이

결국 내게도

이롭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가톨릭이라는 말은

‘보편적’이라는 뜻.

가톨릭의 반대는

무신론자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니고

‘분파주의’라 한다는 말은

그러므로 새겨들을 만한 것 같다.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열심한 사람, 아닌 사람,

이렇게 나누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이

실은 우리가 믿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열 사람이 만나면

열 사람이 생각하는

하느님이 각기 달리

존재한다 해도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크신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저 내가 아는 한 가지 일,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기도할 밖에.

- 소설가 공지영(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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